이 씨를 질책함
“2001년 8월부터 회사는 자금난으로 어려움에 처했습니다. 10월이 되서는 경영이 더욱 악화되어 일반 직원을 제외한 관리자들은 월급을 반납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관리자급 직원들은 어떻게든 회사를 살려보기 위해 정말 성의를 다했습니다. 결국 수입이 없어진 저는 어쩔 수 없이 3개의 카드로 생계를 유지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좀처럼 회사는 회복의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저는 2003년 4월부터 카드빚을 연체시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003년 10월, 회사는 최종 부도 선언과 폐업으로 산산조각 나고 말았습니다.”
이 씨는 지난 8월 법원에 파산 신청서를 냈다. 신청서에 쓴 위 진술은 그가 왜 빚을 질 수 밖에 없었는지를 간결하게 드러내 주고 있다.
생후 34일 만에 입양되고, 3살 때 소아마비 장애를 입게 된 이 씨의 성장환경은 순탄치 않았다. 이런 환경은 중학교를 갓 졸업한 상태의 그를 생업 전선으로 밀어 넣었고, 아무 연고도 없는 서울에서의 직장 생활이 시작되었다. 장애와 저학력, 의지할 가족조차 없는 그의 선택은 당시 성업했을 봉제업이었다. 당시의 이름 없는 노동자들이 그러했듯 그 역시 남대문, 동대문... 봉제 산업의 메카들을 찾아다녔고, 숙식을 해결할 만큼 벌고 썼다. 임금이라고 말하기도 뭣한 급여였지만 그래도 몸은 성실하게 ‘기술’을 익혀갔고, 그 기술은 언젠가 번듯한 위치의 그를 보증할 것이란 사실을 의심치 않았다.
어느덧 숙련공이 되고 ‘회사’라고 불릴만한 업체의 관리자로 스카웃도 됐다. 하지만 업계의 사양화는 그가 통제할 수 있는, 그에게 농축된 기술이 해결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를 포함한 직원들이 2년 이상 월급을 반납하며 노력했건만 회사의 말로는 그들의 의지와는 배반된 것이었다. 열심히 일했고, 스스로 월급을 반납할 만큼 도덕적으로 일했다. 그러나 남는 것은 이미 중년의 나이와 실업, 그리고 2년 동안 생활비로 사용한 카드빚이 전부였다. 의지할 가족도 없었고, 극복했다고 믿었던 장애는 재취업의 걸림돌이 되었다. 삶이란 게 내리막길을 타기란 참 쉬웠다. 실업자가 되었고, 신용불량자가 되었고, 결국에는 노숙생활에 이르렀다.
국민기초생활보장 수급자가 된 이 씨지만 나 아닌 누군가가 생계를 보장한다는 것은 익숙하지 않다. 무료 컴퓨터 강좌를 찾아다니고, 무슨 IT전문학교에도 다니면서 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강좌를 듣는다고 한다. 다시 생계의 책임을 지겠다는 꼬장꼬장한 고집이지만, 결국 평생을 익혀왔고 무엇보다 자신 있는 봉제기술은 버렸다는 의미이다. 재봉틀을 돌리던 손은 컴퓨터 자판에 익숙해져야 되고, 적어도 남보다 앞선 경쟁력 있는 손으로 재탄생되어야 한다.
그가 진 채무의 역사를 들으며 그의 책임을 묻는다.
불우한 가정환경과 장애를 가진 잘못, 낮은 학력으로 생업전선에 뛰어든 섣부른 호기, 흔해 빠진 봉제기술을 선택한 예지 없음, 회사의 위기 앞에 날렵하게 처신하지 못한 우둔함, 없으면 없는 대로 살지 카드빚 내 밥 사먹고, 월세 내고 살아온 계획적이지 못한 소비...
실제 우리 사회는 이런 것들을 잘못이라 부르고 있다.